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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링크 :바그너 좋아해


 


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

 

신이 내린 재능과 인간의 나약함을 함께 지닌 전설적인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서거 125주기를 맞아서.

 

큼 지막한 머리에 매부리코 그리고 돌출한 턱이 특징인 그의 얼굴은 채무자의 불안한 표정이 역력하다. 빛쟁이에 쫓기던 바그너가 빈의 임시 거처를 떠난 것은 1864년 3월말이었다. 바이에른 궁정장관 프란츠 세라프 폰피스터마이스터가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친서를 가지고 빈에 도착하던 바로 그날 이었다.

 

유럽 각지에 걸쳐 그를 쫓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피스터마스터는 바그너를 뒤쫓고 있는 빚쟁이들을 앞질러야 했다. 그는 추격 끝에 슈투트가르트의 마르크바르트 호텔에서 바그너를 찾아냈다. 그는 바그너에게 젊은 국왕의 메달과 함께 당장 뮌헨의 왕궁으로 와 달라는 국왕의 말을 전했다.

 

바그너 를 숭배하다시피 했던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에게 "힘겨운 세상살이의 짐을 벗어주겠다" 고 약속했다. 복권에 당첨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애증으로 얼룩진 "두 왕 사이의 우정" 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우정 속에서 바그너는 19세기 가극의 대가로 성장했다.

 

바그너 의 조상에 대해서는 그의 위대한 악극 "지크프리트"  "탄호이저"  "로엔그린" 트리스탄" "콰르지팔" 만큼이나 근거 없는 얘기들이 많다. 기록에는 바그너가 경찰서기 프리드리히 바그너의 9번째 아이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배우 루트비히 가이어의 소생이라는 소문이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바그너 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던 바로 그해에 발진티푸스로 죽었다. 아버지가 죽자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모조리 데리고 라이프치히를 떠나 드레스덴에 사는 가이어에게로 가서 그와 결혼했다. 그래서 바그너는 일시적으로 계부의 성을 갖게 되었지만 15살 되던 해에 계부가 죽으면서 원래 성인 바그너를 되찾았다. 그의 어머니 요한나 로지에는 귀족의 딸들이 다니는 라이프치히의 사립학교에 다녔다. 빵집 주인의 딸로 태어난 그녀에게는 분명 과분한 얘기지만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화국의 콘스탄틴 왕자가 돈을 대주었다는 설이 있다.

 

콘스탄 틴 왕자는 모험적인 사랑을 즐기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큼지막한 머리와 매부리코에 호리호리한 몸집인 그는 화를 잘 내고 예술 감각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혹시 바그너가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가문의 직계 자손이 아닐까? 바그너의 가극에서도 이상스럽게 귀족적인 특색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피아노 앞에서 연주하고 있는 바그너 (오른쪽은 루트비히 2세)

 

소 년시절 바그너는 화를 잘 내는 성격에 고분고분하지 못하고 제멋대로였으며 악몽과 환상에 시달렸다. 가족과 학교 선생님들은 그런 바그너 때문에 애를 먹었다. 16살이 되자 그는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읽었다. 그때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 에 나오는 프리마돈나 빌헬르미네 슈뢰더 데브린트의 목소리에 반해 음악에 빠져들었다. 바그너의 첫 작품 "북소리 서곡" 은 라이프치히 궁정극장 음악감독과의 친분 덕분에 초연되었으나 청중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젊음이 넘치는 바그너의 피아노 연주는 그야말로 엉터리였다. 그는 대위법(둘 이상의 독립된 선율이나 성부를 결합시키는 작곡법)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의 이 작품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음악만큼 경쾌하게 흘러가지는 못했지만 음악을 아는 사람은 그의 재능을 알아차렸다. 바그너는 라이프치히 성토마스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 테오도르 바인리히의 지도를 받았다. 바인리히는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제자가 성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보상이 되고 남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바그너 전문가 마르틴 그레고르 델린은 말한다.

 

바인리 히는 바그너를 제대로 보았다. 그러나 저돌적인 이 제자가 가야 할 길은 멀고 멀었다. 뷔르츠부르크 극장의 새로 출범한 합창단 지휘자를 맡은  그는 첫 가극 "요정" 의 작곡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가극은 그가 죽은 지 5년이 지난 뒤에야 초연되었다. 다음 작품은 실제 생활에서는 생각도 해보지 않은 "연예금지" 였다. 그는 여배우 민나 플라너에 마음을 빼앗겨 결혼하게 되었다. 그후 두 사람은 쾨니히스베르크에 정착했고 바그너는 그곳에서 음악감독으로 일자리를 얻었다. 극장이 파산햇을 때는 바그너 역시 파산상태였다. 천재음악가로 제왕 같이 생활하느라 가진 재산을 모두 탕진한 것이다. 심지어 결혼반지까지 팔아야 했다.

 

빚쟁이 들이 몰려들려고 하자 바그너는 미리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는 라트비아의 리가로 가서 역시 합창단 지휘자로 일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해고를 당했다. 그와 아내는 다시 국경을 넘어 동프러시아로 들어가 소형 범선 테티스호를 타고 런던으로 건너갔다. 런던에서 다시 파리로 갈 작정이었다. 배를 타고 가다 만난 무서운 폭풍이 그에게 대성공작 "방황하는 화란인" 에 대한 영감을 안겨주었다. 저주받은 선장이 유령선을 타고 7개의 바다를 영구히 항해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내용의 가극이다.

 

파리로 건너간 젊은 부부 바그너와 민나는 비참한 가난 속에서 1840년과 1841년을 보냈다. 일자리도 없었다. 바그너는 여기저기 구걸하는 편지를 썼다. "방황하는 화란인" 초안을 팔기까지 했지만 저작권은 포기하지 않았다. 파리 무대에서 설 자리를 얻지 못하자 바그너는 파리를 떠나 다시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그는 젊었을 때 빌헬르미네 슈뢰더 데브린트에게 빌린 돈으로 고향과 리가에서 빌려 쓴 돈을 일부 갚았다.

 

 

 

Ludwig II (1845-1886)

바그너를 우상처럼 숭배했던 "동화의 왕" 루트비히 2세

 

악 극 "리엔치" 로 바그너는 처음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작센 국왕은 그를 종신 궁정음악감독으로 임명했다. 바그너는 상당한 보소를 받았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랐다. 돈 문제와 빚쟁이들이 그를 놔주지 않았다. 그는 당시를 풍미했던 혁명정신과 혁명주의자 친구 아우구스트 뢰켈의 영향을 받으면서 음악 총감독의 권위에 반기를 들게 되었고 뒤이어 모든 권위를 거부했다. 군주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드레스덴에서 벌어진 "5월 민중봉기" 때 바그너는 집중포화 속에서도 100m 높이의 교회 종탑 위에 올라가 척후병으로 활약했다. 그때 한 동료가 조심하라고 소리치자 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불사신이야!"

 

바그너 는 이제 빚쟁이뿐 아니라 나라에서도 쫓기는 신세가 됐다. 천재음악가 바그너가 혁명가로 변신하자 나라에서는 그를 수배했다. 바그너는 파리에서 만난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의도움으로 1849년 취리히로 갔다. 거기서 그의 예술은 4부작 "니벨룽겐의 반지" 로 다시 꽃피웠다. 또한 그는 "음악 속의 유대주의" 라는 책자를 발간해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레고르 델린은 이 책자를 가리켜 "병든 사람이 내뿜는 독처럼 무서운 글" 이라고 했다.) 나중에 아돌프 히틀러는 이 책자의 게르만 신화에 심취해 바그너의 적품을 "전형적인 독일 음악" 이라고 평가하면서 제3제국의 상징적 음악으로 내세우게 했다.

 

스위스 는 바그너에게 위험스러운 삼각연애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이웃에 미녀 마틸데 베젠동크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예술을 사랑하는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상당한 재정지원을 받았으면서도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결국 바그너의 아내 민나는 바그너를 떠났다. 이때 코지마 폰 뷜로가 지휘자인 남편 한스 폰 뷜로와 신혼여행을 위해 취리히에 나타났다. 리스트의 사생아인 코지마는 바그너에게 위대한 사랑의 여인이 되었다. 바그너는 그녀와 몇 년을 함께 살다가 1870년 결혼했다. 바그너는 취리히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스위스의 산악 경치에 영감을 받아 "발퀴레의 기행" 을,라인강이 흘러가는 소리에 취해 " 라인의 황금" 을 만들었다. " 라인의 황금" 은 4부작 "니벨룽겐의반지" 의 제 1부다. "니벨룽겐의 반지" 는 순금으로 만든 것으로 이 반지를 끼는 사람은 온 세상을 지배한다. 이는 우리 귀에 익숙한 돌킨의 "반지의 제왕" 이야기이기도 하다.

 

 

 

Cosima Wagner (1837~1930)

 

그후 바그너는 베니치아로, 다시 파리로, 빈으로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사치를 누리다 마침내 슈투트가르트에서 루트비히 2세의 특사에게 붙잡혔다. 작센 국왕이 1860년 부분 사면을 내림에 따라 바그너는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에서는 그의 후견인인 바이에른 국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바그너의 가극 "파르지팔" 에 나오는 "성배의 성" 을 모방한 "동화의 성" 노이슈반슈타인성을 지었다.

 

젊엇을 때 바그너의 "로엔그린' 에 큰 감명을 받았던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의 음악에 너무 감동한 나머지 바그너의 병적인 사치를 뒷바라지해주었다. 루트비히 2세는 그에게 브린너슈트라세에 있는 궁전 같은 별장을 주고 뮌헨에 웅대한 축제극장을 지어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가 지금 돈으로 약 950억 원을 들여 공사에 착수할 참이었는데 이것이 너무 지나쳤는지 국민들로부터 항의가 빗발쳤다. 내각에서는 루트비히 2세에게 이 계획을 중단하고 바그너에게 바이에른을 떠나게 하도록 촉구했다. 크게 충격을 받은 바그너는 뮌헨을 떠나 스위스 루체는 부근 피어발트슈태터 호숫가에 새로운 창작의 산실을 마련했다.

 

그러나 여전히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해있던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가 분명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인의 황금" 과 "발퀴레의 기행" 을 뮌헨에서 공연하도록 했다. 1870년 무대에 올려진 "발퀴레의 기행" 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니벨 룽갠의 반지' 4부작을 전부 무대에 올리는 게 아니라면 아예 그만두겠다던 바그너는 격노했다. 그는 "자신의곁을 떠나고 나서 매춘을 강요당하는 딸을 둔 아버지의 아픔" 을 느꼈다. 바그너는 루트비히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라인의 황금" 과 "발퀴레의 기행" 은 이젠 "더렵혀진 얼굴" 이라고 썼다.

 

루트비 히 2세의 '더러운 술책' (바그너의 표현) 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1861년 '탄호이저' 의 파리 초연 때 경마클럽 회원들이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부는 등 난동을 부린 사건이 있은 후 바그너는 이런 돌발적인 행동을 차단할 수 있는 자기 소유의 극장을 갖고자 했다. 이제 그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소는 잘 알려진 바이에른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속의 그 무엇' 이 그를 바이로이트로 가게 했다. 그는 1872년 루트비히 2세의 도움을 받아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축제극장 건설에 착수했다. 루트비히 2세는 20억 원이 넘는 돈을 지원했다. 오케스트라는 청중의 눈에 뜨지 않도록 숨기기로 했다. 신비의 공간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무대 양옆에는 관람석을 만들지 않았다. 그래야 놀라운 음향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로이트 극장과 내부전경

 

바그너 축제극장에는 매년 국가원수, 국왕, 귀족, 유명인사, 운동선수 등 세계의 이름난 사람들이 매년 레드카펫을 밟는다. 입장권은 그들에게 문제될 게 없다. 일반관객들은 8~10년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암표시장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입장권 한장이 100만 원을 넘는다.

 

바그너 의 손자 볼프강 바그너는 88세의 고령에도 매년 바그너 축제를 총지휘하고 있다. 축제극장을 누가 물려받느냐를 둘러싸고 바그너 성을 가진 세 여인 사이에 오랜 힘겨루기가 계속되고 있다. 바그너의 증손녀들인 니케, 에바, 카타리나가 그들이다. 이와는 별개로 2004~2007년 '파르지팔' 의 예술감독을 맡았던 크리스토프 슐링겐지프는 폴 메카트니, 매슈 바니, 더그 에이킨 같은 공연예술가들로 극장운영팀을 조직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바그너의 손자인 볼프강 바그너(왼쪽은 딸 카타리나)

 

이는 극장 자체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만인을 감동시킨 괴팍한 천재 바그너의 걸작들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2001 년 7월 이스라엘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예루살렘 음악회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발췌곡을 연주하자 분노한 많은 청중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스라엘에서는 비공식적으로 바그너 음악이 금지되어 있다. 유대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바그너의 나치 정권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음악이 끝나자 바렌보임에게 박수를 보냈다. 바그너는 세상을 떠난 뒤 100여 년이 지난 후 또 다시 관객을 두 그룹으로 갈라놓았다. 그는 1883년 2월 13일 베네치아에서 글을 쓰다 아내 코지마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종이에 쓴 마지막 말 '사랑과 비극' 은 마치 그의 일생을 요약하고 있는 듯하다. 

 

 


바그너의 작품은 소품과 행사용 작품까지 모두 113편이다.

www.wagneroperas.com에 들어가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오디오 자료와 비디오 자료도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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